대전 이보흠씨 고려(부사순흥, 이영천씨)

조선 세조 때 순흥으로 유배된 금성대군(세종의 6남)이 단종 복위 운동을 벌였으나 갑작스러운 사건으로 미리 발각됐다.

그리고 순흥은 역적의 본거지였기 때문에 순흥부로 격하된 마을이 되었고, 이러한 정치적 격변으로 인해 조선시대에는 위대한 인물이 태어나지 않는 마을로 바뀌었다.

순흥안은 본성이 하나밖에 없는 귀한 성이다.

안씨는 한 가족이다.

물론 중종의 첩인 안창빈은 안산안이지만 안산을 가진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안산안씨도 순흥안씨로 흡수되었거나 안창빈씨가 당시 안산에 한동안 거주하며 나름대로 분가를 시도한 것으로 추측되지만 오늘날 안씨는 모두 안산씨족이다.

안순흥씨. 안자미는 안향을 중심조로 삼는 순흥안씨의 시조이다.

현재 영주시에 속한 순흥면은 고려시대부터 매우 큰 도시였으나 조선시대에는 순흥도호부로 명명되어 인근 여러 마을을 관할하였다.

순흥도호부(주문하다번영하다모두보호하다정부)는 1413년(태종 13)과 1683년(숙종 9)에 세워져 1895년(고종 32)까지 이어졌다.

관할권을 가졌다.

1413년(태종 13) 순흥부는 순흥도호부로 개편되고 3품 도호부사가 마을을 다스렸다.

안순흥은 시조의 증손자이다.

안향 그 이후로 크게 번성했습니다.

안향은 고려 원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교서랑(校書郞), 어사(監察御史), 상주판사(尙州判官) 등을 역임하였다.

충렬왕 복직되자 판판도사(判版圖司事)가 되어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하고 후진양육에 힘쓰며 유교의 풍류를 일으켰다.

특히 제자 밑에서 백이정, 우탁 등 뛰어난 유학자를 배출했다.

이제현(이기현) 과 이국적인(이형). 또한 권근(權近)은 이색의 학파를 나와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다.

우리나라 성리학의 총본산으로 추앙받고 있으며, 장단의 임강서원(臨江書院)과 순흥의 서원이 있는 곳이다.

소수서원, 곡성군회헌영당에 모셔졌다.

그의 묘는 장단 대덕산에 있다.

경기도 부곡에는 안자묘가 있다.

안향안의 아들 안우기는 찬성을, 손자 안목은 정당문예를 맡았다.

조선시대에는 안침, 안당, 안위, 안현, 안상 삼형제가 유명하다.

안침은 세조 입학시험 합격 후 전라도 관찰자와 한성부윤, 대사헌, 경상도 무사 등을 역임하고 공무판사를 거쳐 지돈령부사에 이르렀고, 오남매도 모두 깨달음을 얻었다.

안단은 성종 지방고시 합격 후 중종 형조, 공조, 이조판서를 거쳐 의정과 좌의정을 역임하였다.

1521년 신사무옥그는 범죄에 연루되어 그의 아들 안처겸이 처형될 때 살해되었다.

안위는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경국 대전, 호조판서와 형조판서를 역임하였다.

또한 안현은 중종 때 문과에 급제했다.

명종 당시 이조판서의정, 의정, 좌의정을 역임했고 청백리 녹색당에 당선됐다.

안상은 음악에 조예가 깊어 선조 때 거문고, 비파, 장고를 연주하였다.

망할 음악인교서공파를 망라하는 금합자보 발간 고려 사항 유명한 말의 신인 안축, 안보, 안즙 삼형제가 유명하다.

충숙왕 때 안축은 원제과에 급제하여 전법판서가 되었다.

안보는 공민왕 때 정치문학을, 안습은 대제학을 공부했다.

삼형제 중에는 안축의 후손이 많은 인물이 있다.

안축의 아들 안종원은 조선 건국 후 삼사영사에 올랐다.

집현전 그것은 위대한 과학이 되었습니다.

안경사의 아들인 안순과 그의 손자인 안성선, 안성효 역시 위대한 신으로 유명하며, 안성선의 증손인 안자유, 안명세 등이 뛰어났다.

고려 말 안씨 가문에서 수많은 학자가 배출된 것은 역사적이다.

그러나 조선시대 유배되어 안치된 금성대군 단종과 이곳을 다스리던 관료 이보흠의 복위운동으로
안순흥 가문이 소멸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단종의 복위와 관련된 정축지변이 대표적이다.

또한 안당과 그의 아들 안처겸은 기묘사화에 이어 신사무옥에서 처형되었다.

을사사화 그 때 안명세에게 재앙이 닥쳤다.

이등손님을 저격한 이순신에 이은 안중근과 안명근의 경우 일제가 순흥 안씨 일가에 가한 탄압도 언급할 만하다.

그들 중 가장 큰 소멸 복위 사건과 관련된 정치적 격변으로 당시 순흥으로 유배되었던 금성대군(세조의 남동생)이 왕위를 복위시키려던 단종과 관련하여 적발된 사건이다.

영월로 유배되었다.

이 사건으로 단종과 금성대군이 죽임을 당하고, 순흥도호부에 살던 순흥안씨는 절멸되어 전국으로 흩어졌다.

순흥 안씨 대주교 홈페이지

위와 같이 순흥은 한국의 역사마을이다.

사악서원인 소수서원이 있는 곳으로 선비들의 고향으로 영주시에서 대대적으로 발전해 왔다고 한다.

근처에 텐승지. 풍기인삼과 부석사가 더욱 유명해지고 있다.

순흥은 정치적 위기와 사제의 감옥을 겪게 된다.

김말손(金末孫)이 아버지인 유학자 김현욱(金賢煜)을 살해한 강상사변 때문이기도 하다.

그 결과 현으로 강등되어 10년 동안 현암 6품이 파견되었다가 1838년(헌종 4) 순흥도호부에 복위되었다.

(네이버백과사전) 순흥도호부 (順興都護府) (한국지역문화전자전)

다양한 역사적 사건을 겪은 순흥은 영주의 하나로 남아있지만 최초의 사랍대학인 소수서원이 존재하는 역사적 장소이다.

순흥도후부는 조선 초기에도 큰 도시였다.

그러나 세조의 왕위 찬탈로 많은 관리들이 죽고 단종은 노산군으로 좌천되어 영월로 유배되었다.

이때 세종의 둘째 형인 수양의 왕위 찬탈에 분개한 세종의 6남 금성대군은 순흥으로 유배되어 위안치에 갇혔다.

성삼문, 박팽년 등 육신과 함께 단종복위운동에 참여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곳에 유배된 뒤에도 마을을 담당하던 대전지사 이보흠과 함께 단종의 복고를 추진하려 했다.

군대를 집결하여 성명서를 전달하기 직전에 순흥국의 매춘부와 여종은 성명서를 훔쳐 자백하기 위해 이곳을 떠났다.

이를 감지한 풍기지사는 도중에 복권조서를 압수해 당시 세종대왕에게 보고했다.

발견된 단종 복원운동은 허사로 끝났다.

금성대군은 그의 동생이었지만 무참히 살해당했고, 순흥 중장의 이보흠의 동생도 학살당했다.

그리고 이곳 주민 순흥안을 비롯한 민간인 300여명이 사망했다.

이때 죽계천을 흐르는 물은 붉게 물들어 안정면 동촌리까지 이어졌다.

그래서 이 마을을 피의 마을이라고 합니다.

금성대군과 이보흠 장군에 의해 야기된 정치적 격변의 이야기는 왕비전 세조 편에 나온다.

조선시대에는 세자의 난이 두 번 있었는데, 이시애의 난,